설계라는 묘한 활동, 드러나지 않는 결정 대상
설계를 설명하려고 들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오래 해왔습니다. 멀리 가지 않고 제가 쓴 글만 봐도 2017년부터 2023년에 이르기까지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했지만 막상 정리하지 못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일종의 출사표를 내민 후에 파편의 아이디어라도 부단히 쓰고 피드백을 받아 소통하는 길이 방법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일단 멈추고 상대에게 기울여야 경청이 가능하다
그러는 중에 동료와 화상 미팅을 하면서 남은 여운에서 무언가 꺼낼 수 있을 것 같아 시도를 합니다.
서로 다른 두 집단 사이에서 교류가 되지 않는 이슈를 다루면서 포착된 주제였습니다. 양쪽 집단에 모두 속한 저는 한 쪽에만 속한 동료의 질문에 답을 했습니다. 질문을 들으면서 질문한 동료가 빠진 다른 집답의 회의에서는 들을 수 없던 일종의 ‘사각지대’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최근에 쓴 글 탓인지 ‘유혹 혹은 편항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마음의 밭을 키우기’ 위한 경청이 꼭 필요하다고 재확인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전에 썼던 글에서 ‘경청’을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먼저,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 왜곡해서 들을 우려’를 지적한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일단 멈추고, 존재를 기울여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대화에 담긴 맥락을 전하는 일은 내용 만큼이나 중요한 일
이와 같이 검색한 ‘경청’에 대한 깨달음과 ‘사각 지대’의 연관성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은 손에 잡힐 듯했습니다. 제가 동료가 속하지 않은 집단을 대표해서 동료가 말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항변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너무 뻔한 내용이라서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말을 동료의 시각으로 다시 보면, 그를 협업 대상에서 배제하는 효과가 나는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논의하는 사안은 그와 무관하게 실행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죠. 맥락을 모르고 만든 수많은 기능들이 지금도 버려지고 있습니다.
사업적 의사결정에서 프로그램 개발은 어떻게 다룰까?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현업? 기획자? <과연 관광 콘텐츠의 정의는 무엇일까?>를 쓰고 난 직후라 그러한지 우리나라는 정의 없이 말을 쓰고 바꾸는 일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만 국한해서 이야기하면 이런 관행은 똑같은 기능을 만들 때, 개발자마다 전혀 다른 이름을 쓰도록 조장하는 환경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객관적 정의를 할 수는 없겠으나 문제 의식은 공유해 놓고, 이 글에서는 사람들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소통의 종류로만 나누어 ‘사업 미팅’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외래어가 포함된 부분이 거슬리기는 하는데, 일단은 무시하고 씁니다. 사업 미팅에 개발자가 포함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적지 않은 개발 경험을 지닌 저도 얼마 전 동료와 대화할 때 깨달은 것이니 쉽게 알려지지 않는 사실 같기는 합니다. 사업 미팅에 개발자가 참여하면 상당시간 그는 지루하게 듣기만 하다가 회의에서 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적 의사결정에 있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출시 일자, 비용이나 기능 따위가 아닌 요소는 간과될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예로 든 ‘사각지대’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면 말이죠. 저의 사레에서는 그 일을 하는 ‘사업적 맥락’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이제 와서 화백의 중요성을 이해하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님들이 저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대체 이게 설계와 무슨 상관이람?
대화 후에 그냥 걷는 중에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개발자가 말한 이슈가 말로 표현되지 않으면 다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 개발자든 개발자가 아니든 말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를 다룰 수 없습니다.
제가 IT컨설팅 회사에 다닐 때, 구현은 하지 않고 PPT로 계획과 구상이 담긴 장표만 찍어내는 동료를 ‘화백’이라 불렀습니다. 집약적인 정보를 배치하는 일에 대한 존중도 담겨 있지만 그 일만 천착하며 실현 가능성(구현)과 먼 결과에 대한 비아냥도 담긴 말입니다.
오늘에서야 그 일이 왜 시장에서 비싼 돈에 팔리는지 깨달은 듯합니다. 거기 담긴 수많은 말과 도식화는 구조화된 이슈들의 서식처였습니다. 현장과 의사결정 집단이 멀리 떨어진 대기업에서는 그런 형태로만이 의사결정 결과가 운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름대로는 의사소통의 고속도로를 구축했던 것입니다.
(글이 길어져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